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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님이 다시 주문을 받으러 돌아가고, 잠시 우리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미사키 님은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이다. 이런 분위기를 풀려면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게 최고다. 그러려면 역시 미사키 님의 기분을 풀어줘야지. 저기요.

"미안. 도영 오빠 하고는 만난 지 한 달 정도 돼서 말이야."

마치 친남매 같아요. 그러자 급격하게 얼굴이 굳어버리는 미사키 님이었다. 당연하지만 하루카 님과 미사키 님이 친남매이지, 테리토리오 점장님과는 아니다. 그런데, 실제 반응 같은 것들을 보면 오히려 미사키 님과 점장님 쪽이 친남매 같단 말이야. 어찌됐든 이야기 보따리는 풀어봐야 되겠다.

나와 미사키 님이 엮인 첫 에피소드는, 역시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점지해 주셨던 학교는 '왕립 오카 학원 중학교'(王立 桜華学園 中学校), 당시 미사키 님이 다니던 중학교였다. 그 학교를 위해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당당하게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반 배정이 끝나고 열흘 정도 지나서는 반장선거가 있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친구 고마츠(小松)가 나를 추천해 줬다. 나는 그저 머뭇거렸지만, 고마츠 옆에 앉은 남학생 요코이(横井)는 물론 그 앞의 친구 오오사키(大崎) 역시 나를 반장으로 추천하면서 상황은 점점 꼬이게 되었다. 결국 나는 만장일치로 반장에 뽑히게 되면서, 그 날 방과 후에 진행된 학생회 회의에 끌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첫 학생회 회의에서도, 나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첫 회의에서 미사키 님은 각 반장의 이름을 차례대로 읊어 나가고 있었는데, 하필 내가 첫번째였다.

'1학년 A반, 사쿠라다 미사키.'
'네. 사쿠라다 선배!'

분명 이런 대화였는데, 어찌 웃음바다가 안 됐을 리 있겠나. 그 날 밤에는 진짜 이불을 엄청 찼던 나머지, 정말로 이불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와는 별개로, 나는 점점 미사키 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미사키 님은 다른 반장들에게도 신경쓰느라 나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즐겨야지. 나는 반장이라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다음 해에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 때 고마츠와 오오사키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제2대 사쿠라다 미사키의 탄생이네. 축하해.'
'사쿠라다 선배가 했던 대로 하면 돼. 힘 내.'

그리고 올해는 '제2대 사쿠라다 미사키'라는 이름으로 학생회장이 되었다.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건만,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새 테이블이 꽉 차 있었고 점장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는 뉘앙스로 말을 꺼냈는데, 미사키 님은 하루카 님을 찾고 있었다. 하루카 님은 진작에 누나를 버리고 집으로 갔다고. 미사키 님은 좀 더 있으면 안되냐고 물었지만.

"제발 좀 가라. 이것들아."

네. 역시나 깨갱이었다. 별 수 없지만, 여기를 떠야 되겠다. 안 그래도 점심엔 크림하고 약속이 있단 말이지. 아, 재스민 차는 잘 마셨어요. 그리고 돈은 제가 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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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있다며 먼저 돌아가 버린 미사키를 뒤로 하고, 나도 곧바로 카페를 나섰다. 그런데 나서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해 봤는데, 역시나 하루카였다. 응, 하루카. 근처 식당에서 점심 먹자고? 알았어.

전화를 끊고 하루카가 미리 메일로 던진 주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식당은 하루카가 직접 찾아준 고오급 레스토랑이란다. 그러고 보니 미사키도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맞다. 미사키하고는 이름만 알고 있는 사이이지. 진짜 바보같은 미사키다. 다음에 만나면 메신저 아이디라도 알려줘야 되겠다.

"왔어?"

어쨌든 하루카가 일러 둔 대로 찾아간 곳은 분위기가 있는 한 레스토랑, 아마티놈(Amatinom)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테리토리오와는 달리 식사가 가능한 이 곳은 슈 오빠의 연인 사토 하나 씨가 공개적으로 연애 선언을 한 곳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하루카는 나 몰래 이 식당에다 2명 자리를 예약했다고.

메뉴판을 받아든 하루카가 무엇을 시킬까 고민하고 있었다. 메뉴판을 받은 건 나도 마찬가지. 무엇을 시킬까 고민하고 있던 참에, 하루카가 먼저 수수한 메뉴를 골랐다. 여기 왔으면 적어도 초코 케이크 정도는 먹어야 할 거 아냐, 아직 이른 시간인데 식사 하시려고 또띠아 치즈 스파게티나 시키다니.

"엄마도 오늘 비상근무가 있으셔서 말이야. 그러니까 미리 챙겨 먹고 집에 일찍 들어가야지."

그리고서는 집에 남은 밥이 없다며 쐐기를 박는 하루카였다. 모르겠다, 저도 또띠아 하나 주세요.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입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