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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가 없는 사이에, 나는 잠자리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샤워도 했고 잠옷으로 갈아입었으니 채비는 다 한 것이다. 오늘도 마음 편하게 잘 수는 있겠다.

…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 또 다른 '사쿠라다 미사키'를 만난 것에 마음이 들떠 버린 탓이다. 별 수 없다. 내일 할 일이나 읊어야 되겠다. 내일은 시내 문화 공연이 있으니 무대를 설치하고 손님 맞이하고, 하여튼 갖가지 일을 해야 한다. 공연 관람은 무료인데다가 공연장도 크니 사람들이 많이 붐빌 것 같아도, 나에겐 일곱 분신이 있으니까 버틸 수는 있다. 준비만 단단히 하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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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이지 기적같은 하루였다. 평소에는 거들떠보도 않으셨던 미사키 님을, 오늘은 두 번이나 제대로 만나게 돼서 말이다. 기분이 너무 좋아 샤워 중에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미사키, 내일 공연 준비 한다면서? 일찍 자 둬라."

아빠는 나더러 일찍 자라 재촉하시지만, 어차피 오늘은 일찍 잘 참이었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한 것은 미사키 님의 선거공보를 읽어보는 것. 선거가 끝난 지 3년도 넘게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미사키 님의 선거유세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자를 버리지 않고 있는 거다. 책의 첫장에는 '평범한 사람이 즐겁게 사는 나라'라는 슬로건이 쓰여 있는데, 그 슬로건이 나에겐 정말로 마음에 든다. 비록 미사키 님은 국왕선거에서 낙선되었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국왕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근 '레온토도 엔 카스텔투로'라는 팀 아래서 같이 일하고 있고 말이지.

아무튼 내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아까도 말했듯 공연 준비. 공연장도 큰 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후원을 받아 하는 공연이라, 사람이 많이 붐빌 것 같다. 무료 공연이라는 점도 한몫하고 말이지. 내가 직접 공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일 오후 2시에 시작하니 적어도 9시 이전에는 나갈 채비를 마쳐야 한다. 당연히 일찍 자 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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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투로(도영 씨의 집)에서 간단하게 얘기를 나눈 뒤, 나는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도영 씨는 식구들과 나눠 먹으라며, 김치를 한 통 주었다. 조금 맵기는 하지만, 밥하고 같이 먹으면 된다고 말이다.
그나저나 내일은 미사키가 봉사활동을 하는 날이다. 미사키 혼자서 신청하였기에, 나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미사키가 또 다시 미사키를 만날 가능성이 적잖이 있다. 혹시나 해서 계산을 수행해 보았다.
99.54 퍼센트.

브레이크 아웃 때문에 오차가 심하게 났나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계산을 해 봐도 확률은 99.5 퍼센트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미사키가 피곤해 질 거라는 결론만 낸 채, 약간은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김치의 무게가 엄청나다.)

방으로 들어와 보니, 미사키는 이미 자고 있었다. 내일 할 일이 있으니까 당연한 것이겠지. 그나저나 미사키의 잠꼬대가 이상하다. 계속해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사실 자기 이름이기 보다는, 그 미사키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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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건물이다. 나는 분명 내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깨어 보니 바로 책상에 있었다. 심지어 침대에서 편히 누워 자는 것도 아니고, 책상 위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고, 교실에는 아무도 없다. 깜깜하기 짝이 없는 깊은 밤에, 나는 혼자 깨어 있었다.

일어나서 확인해 보니, 중학교 때 입었던 그 교복 그대로다. 가방이 없어서 치맛자락을 훑어 보았다. 없어 보일 듯 한 게 짚힌다. 주머니인가? 꺼내보니 휴대폰이 있다. 이걸 손전등 삼아서 교실을 탐색해 봐야 되겠다.
교실은 전혀 잠기지 않았던 덕에 문을 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나는 곧바로 기억을 더듬어 교문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가로등이란 가로등은 전부 꺼져 있고, 주변을 밝혀 주는 것은 은은한 달빛 뿐. 하지만 달빛은 교실 안까지 환하게 비추지는 못하기에, 나는 여전히 스마트폰 손전등에 의지해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누구야. 누가 있는 거야? 나는 곧바로 인기척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의 발자욱 소리와 그 애의 발자욱 소리가 겹친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애도 교문을 향해 걸어가는 것 같다. 걷는 소리를 봐서는 나랑 같은 로퍼인 듯 한데.

그렇게 소리를 쫓아가 보니 어느새 밖으로 나가는 문이 보인다. 그런데 달빛을 받은 실루엣을 보니, 전에 왓칭 때 봤던 내 뒤통수와 너무나도 유사했다. 내가 조금 더 빨리 걷자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모습. 내가 밖으로 나서자 그 애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인다. 틀림없어. 저건 내 모습이야. 나와 같은 사람, 적어도 나의 분신이라고.

교문이 굳게 잠긴 탓인지, 그 애는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가까이서 봐도 교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렇다고 굳이 자물쇠까지 달 필요는 없었잖아. 아무튼, 나는 그 애를 뒤에서 돌려 세웠다.

내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 하지만 '또 다른 미사키'는 어째서인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분신도 있는 주제에. 분신 얘기가 나와서 곧바로 듬직한 유니코를 소환하려 했다. 어째서인지 유니코가 나오지 않는다. 다른 분신들을 부르려 해도 무반응. 저쪽의 미사키 역시 분신을 소환할 수는 없는 듯 하다. 별 수 없지. 나 혼자서라도 해결해야 되겠다.

아직도 미사키의 뺨에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 나는 그 눈물을 천천히 닦아 주었다. 그러더니 미사키는 활짝 웃으면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미사키한테서 한 줄기의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빛은 순식간에 나를 감싸 돌았다.

… 꿈이었다. 너무나도 생생했던 꿈. 대체 무엇을, 어떻게 암시하는 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루카한테 꿈풀이를 부탁해 보고 싶었지만 하루카는 이미 잠들어 있고, 분신들을 풀어서 하소연하고도 싶어도 아침이 밝으려면 한참은 기다려야 한다. 다시 잠을 청하려 해 봐도, 한 번 달아난 잠은 날이 밝을 때 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대체, 무슨 꿈이었지?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입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