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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 오늘따라 가는 길이 막혀서 죽는 줄 알았다. 게다가 버스 정류장까지의 거리가 멀다는 점이 야속하다. 집에서 뛸 때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내려서 다시 뛰어야 한다는 게 정말 짜증난다. 특히나 다시 뛸 때에는 이미 지쳐 있고 말이지. 그렇게 문화회관 앞에 도착해 있을 때에는 더 이상 뛸 힘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자원봉사자 대기실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9시 1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 쯤이면 이미 시작했을 것 같은데, 일단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 사쿠라다 미사키. 거기 앉아요."

늦었긴 했지만, 어찌됐든 출석은 인정되었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는데, 옆을 보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석화되어 버린 한 여자가 있었다.

저기, 미사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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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하! 그거 진짜로?"

네. 제가 계산했을 때 확률이 99.5 퍼센트 이상으로 나타났더라고요. 몇번이고 다시 확인해 봤는데도 말이죠.

그러자 이마에 손을 짚는 도영 형. 그렇게 치면 미사키와 미사키가 2번째 만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저기, 도영 형. 어제 또 만나서 이번이 3번째입니다만….

"하하하하하! 세ㅋㅋ번ㅋㅋ째ㅋㅋ."

첫번째와 두번째는 우연일 수 있겠지만, 세번째 부터는 필연이라면서 미사키들을 놀려대는 도영 형이었다. 저기, 그렇게 웃기신가요.

"야, 이 나라에는 성씨도 많잖아."

… 곧바로 이해가 된다.

아무튼 준비해 놓은 커피가 다 떨어졌다는 이유로 일찍이 문을 닫은 도영 형은 곧바로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하나만 빼고 말이다. 그리고는 늦잠을 잔 게 후회된다며, 점심 먹고 바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시라기 씨'라 하는 것을 보니, 집사 쪽 전화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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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색한 적막이 흐르고 있다. 고등학생 한 명과 중학생 한 명. 그것도 같은 이름. 우연도 이런 기막힌 우연이 없다. 아니, 애초에 이걸 '우연'이라 할 수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든다. 한두번도 아니고 3번 씩이나 만났으니 말이다.

스파르타 출신의 한 양치기가 오르페우스의 대타 역할을 맡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이 진짜 오르페우스의 절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만큼이나 뜬금없다. 정말이지 우연의 장난은 끝이 없나보다.

얼마나 끝이 없냐고? 팀을 결정하는 제비뽑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본래는 이름 순서대로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사쿠라다 미사키가 둘 씩이나 있으니 왕족인 내가 맨 뒤로 밀려났다. 애초에 다들 내 능력을 알고 있는 듯 하니, 담당은 정해졌고 나는 대답만 하는 식이었다.

"히로시는 뭘 뽑았냐?"
"죽겠다. 난 설치 팀이야."

이런 대화가 주로 오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름 순서이니 사카키 다음은 사쿠라다. 그것도 미사키. 미사키가 제비를 뽑으니 긴장이 된다. 아니, 왜 본인이 아닌 내가 긴장을 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나는 마지막이니까 선택 권한도 없고. 어찌됐든 나는 홍보 담당이라 분신들과 같이 팜플렛을 나눠주면 된다. 그렇게 해서 홍보 담당으로 남은 자리는 단 두 자리. 이제 팀 별로 다시 모이면 된다.

… 했는데, 그 중 한 자리를 꿰찬 사람이 하필이면 동명이인이다. 확률이 0%나 100%가 아니면 확신하지 말라는 하루카의 조언을 무시한 나의 잘못이다. 다른 한 사람은 남학생으로 팜플렛 보급을 맡게 되었는데, 두 명의 사쿠라다 미사키가 있어서 그런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를 피하려 하는 모습이랄까. 그렇게 남학생이 가고서는 우리 둘만 남았는데, 저쪽 미사키가 말을 꺼낸다.

"미사키… 님?"

응, 무슨 일로?

"사실, 전…"

응? 날 뭐?

"사실 전. 예전부터 미사키 님을 좋아했습니다!"

자, 잠깐만. 방금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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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 50명 중에 2명이면 4 퍼센트 밖에 안 되는데, 그 4 퍼센트의 확률로 미사키 님과 같은 팀에 배정된 거다. 또 다른 한 명은 남학생으로, 홍보물 따위를 운반하는 담당이다. 남학생이 가고 우리 둘만 남았으니, 이제는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미사키 님은 전부터 몇번이고 만나봤다. 어제도 얘기했지만, 나는 현재 중학교 학생회장이다. 그것도 '제2대 사쿠라다 미사키'. 그런 이름으로 거의 일주일 전에는 미사키 님과 같이 퍼즐을 맞추기도 했다. 물론 나는 수업이 있었기에 일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뜨긴 했지만. (게다가 교장선생님께서 부르셔서 온 것이기도 하고.) 그 때에는 많이 어색했던 탓에 '사쿠라다 선배'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편하게 '미사키 님'으로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심정을 말로 풀어 내뱉으려 하니 가슴이 떨린다. 하지만 오늘이야말로 미사키 님과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어제는 테리토리오에서 한 번, 아마티놈에서 또 한 번 기회를 날려먹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침은 말라가고 말은 자꾸 나오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다.

사실, 전…

예전부터 미사키 님을 좋아했습니다!

아뿔싸. 뜻밖의 고백을 하고 말았다. 머리가 하얗다. 혼자 다른 세계에 빠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 그런 무의 세계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소리야.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거지."

미사키 님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무의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입니다.
※ 다음주는 개인 사정으로 휴재합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