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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라면 충분하겠지, 손님도 없고.

겨울비 답지 않은 폭우를 뚫고 테리토리오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테리토리오의 손님은 단 둘. 마츠오카 코시(松岡幸志) 씨와 요네자와 사치코 양. 딱 봐도 다른 손님은 올 것 같지 않다. 솔직히 이렇게 세찬 비를 뚫고 아메리카노 한 잔 주문할 사람이 있겠나. 아무튼 두 특별 손님을 맞이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가게 불을 켜고 셔터를 반 쯤 내려놓았다. 오늘 영업은 사실상 이 두 사람을 위한 거다.

이제 다시금 내 능력을 보여줘야 할 때다. 천천히 눈을 감고, 손바닥에 모든 것을 집중…. 내 머릿속에서 다시 설원 속 마을을 떠올리는 거야.

요네자와가 쓴 가사를 다시 떠올…릴 수 없네. 그새 다 까먹어서. 마츠오카 씨한테 MR을 요청해야 되겠다. 그러자 마츠오카 씨는 곧바로 나에게 USB 메모리를 건네줬다. 이걸 오디오 장치에 꽂고, 리모콘 들고 온 다음에 천천히 눈을 감고.

재생.

아직 가사가 삽입되지 않은 음원에 따라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

설원 속 마을.
마을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
아이들의 미소.
미소를 머금은 눈사람.
눈사람 머리에 씌운 중절모.
중절모를 한 아가씨.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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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토리오의 점장은 손을 뻗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곧이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테이블 위에서 펼쳐지는 온갖 이미지였다.

설원속의평화로운마을.
설원속의평화로운마을속에서뛰노는아이들.
설원속의평화로운마을속에서뛰노는아이들의미소.
설원속의평화로운마을속에서뛰노는아이들의미소를머금은눈사람.
설원속의평화로운마을속에서뛰노는아이들의미소를머금은눈사람머리에씌운중절모.
설원속의평화로운마을속에서뛰노는아이들의미소를머금은눈사람머리에씌운중절모를한아가씨.
설원속의평화로운마을속에서뛰노는아이들의미소를머금은눈사람머리에씌운중절모를한아가씨의도도함.
설원속의평화로운마을속에서뛰노는아이들의미소를머금은눈사람머리에씌운중절모를한아가씨의도도함이묻어나는동상.

점장은 그 이후를 떠올리려는 듯 애를 써 보지만, 테이블 위의 이미지는 점점 흐려지고 더불어 점장의 표정도 구겨지고 있다. 테리토리오 점장이 눈을 뜨자 테이블에 있던 이미지는 눈 녹듯 사라졌다. 남은 것은 점장 이도영 씨의 이마에 맺힌 땀이었다.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입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