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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보니 어느새 햇빛이 선명하게 내 방을 핥고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7시 반. 이대로 좀 더 자고 싶….

… 펙(fek). 망했다. 씻지 않고 출발해도 일러야 8시 20분.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지각이다. 아침 먹을 시간도 없으니 그냥 가야지. 저녁은 별 수 없이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 먹어야지, 원. 게다가 지금은 러시 아워이니, 지각은 이미 확정이겠구만. '러시 아워'(Rush Hour) 하니까 자꾸 '러시아 워'(Russian War)가 생각나기도 하고. 엔 루시오, 빈 트라파스 트라피코!(En Rusio, vin trafas trafiko!)

그렇게 재미 하나 없는 트래픽 잼을 겪고 테리토리오에 도착, 휴대폰은 친절하게 8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의 혼은 이미 미국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오직 선만이 존재하는 평온한 세계로.

그렇게 꿈인지 생시인지 인간인지 산송장인지 모르는 채로 헤매고 있었는데, 얼핏 보니 테리토리오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누가 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확실하게 아메리카노 소녀들이다. 나이는 이미 소녀, 크나비노(knabino)가 아니지만.

"보난 마테논, 오늘은 늦었네요."

아, 음. 브능 므트능. 아침부터 지쳐서 인삿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다들 첫 출근인데 점장이라는 새끼가 꼼짝없이 지각이라니, 면목도 이런 면목이 없다.

"좋은 아침. 어제는 괜찮았어요?"

아메 씨, 괜찮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미소가 참 좋긴 합니다만, 미안 쏘리 파르도논(Pardonon). 아침부터 혼이 빠져나가고 있어서 말입니다.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말이지.

"정말, 점장으로서 모범을 보이시라고요."

이어 점장을 크게 꾸짖는 리카. 하극상이긴 하지만 팩트라서 반박할 수 없다. 이어 베이커리를 위해 오븐이라도 들여놓자고 하소연한다. 마음 같아서는 들여놓고 싶지만 자리가 되는지부터 문제이고. 아무튼 못난 점장을 둔 점원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리해서 아메, 메리, 리카 까지는 확실히 보이는데 마지막 카노가 안 보인다. 다원결의(茶園結義)를 했다는 아씨들이 오늘 따라 흩어졌나 아니면 첫 날부터 땡땡이를 쳤나 싶었건만, 눈을 씻고 보니 멀리서 카노가 오고 있었다. 아뿔싸, 바로 옆에 소와 씨 까지. 그나저나 뭔가를 갖고 오고 있는 것 같은데, 뭐지? 아. 그러고 보니 다들 평상복을 입고 왔네.

"도영 씨. 조절이 잘 되지 않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점원들 앞에서는 모범을 보이시라고요."

소와 씨 한테도 꾸짖음을 당하고 만다. 정말이지 면목이랄 게 없습니다요. 아무튼 카노가 갖고 온 것을 확인해 봤는데, 어디서 맞춘 듯한 옷가지들이다.

"사실 엊저녁에 옷 치수를 재 봤거든요. 맞는 게 있나 살펴보기도 했고. 다행히 남는 게 있어서 그걸 꺼내 봤어요."

아. 옷이었습니까. 비축해 놓은 옷이라니. 아무튼 메리가 하나, 내가 하나 꺼내 보았다. 메리가 꺼낸 것은 아랫도리가 바지로 되어 있는 평범한 정장 스타일의 옷. 반면에 내가 꺼낸 것은… 맙소사, 리본에 프릴 까지 달려 있는, 정말 화려하기 짝이 없는 메이드 복이다. 나로서는 평생 입을 일 없는 한벌옷을 보고 당황하는 와중에.

"점장님, 입어 보실래요?"

아니,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메리 란도 씨! 이런 옷은 더러워지기 쉽단 말입니다, 세탁도 어렵고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에서 확 깨 버린 나는, 소와 씨한테 옷을 가지고 온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꽤 단순했다.
타케우치의 선택 장애.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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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45분.
우리가 처음으로 테리토리오에 출근한 시각이다.

왜 이런 얘기부터 꺼내냐면, 우리는 전부터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고 있어서 그렇다. 똑같은 꿈을 찾아 여기저기서 온 4인의 소녀. 그렇게 우리 '아메리카노 걸스'의 동거생활은 시작되었다.

리더가 누구인지는 딱히 정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집값도 광열비도, 그 외 다른 생활비도 나눠 내는 게 아메리카노의 철칙이니까. 그래도 나, 메리 란도가 대외적으로는 리더이다. 어려서부터 여러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라온 지라, 어디에 가도 말이 잘 통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머지 셋이 영어를 그리 잘 쓰는 건 아니라서 말이지. 그래도 나에겐 비장의 언어가 있으니까 괜찮아.

아차, 다시 면접 얘기로 들어가야지. 아무튼 우리는 오늘부터 '테리토리오 데 레온토도'라는 카페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옷 치수를 얘기했던가. 그것부터 얘기해야지.

'내일부터 출근해야 하니까, 옷 치수부터 알려주세요.'

소와 하츠키 씨. 테리토리오 점장 이도영 씨의 직속 상관이자, 왕궁 집사부의 부장님이시다. 20년 경력의 베테랑 집사로, 당연히 집사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으신 분. 다만 커피 실력은 점장(되실 분)이 한층 위라고 한다.

… 그런데 그 점장이라는 사람이 왜 이리 늦게 오는 거야. 8시 30분이나 됐는데도 오지 않네. 안 되겠다. 리카는 집사부 가서 가게 열쇠 빌려올 수 있지? 카노는… 맞아. 갈아입을 옷 가져오고. 그렇게 조금을 기다렸을까, 리카가 가게 문을 열고 손님맞이를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에이고 늦었다."

모범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안 보이는 우리의 점장, 도영 씨가 도착했다. 보난 마테논, 오늘은 늦었네요. 저희 첫 출근인데. (빠직)

"응. 브능 므트능."

그런데 어제 일 때문인지 안색이 영 좋지 않은 도영 씨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메가 괜찮냐고 물어보았지만, 점장은 혼이 빠져나간 듯 아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리카는 점장 더러 모범을 보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가 버린 도영 씨는 끝내 카노가 돌아올 때 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카노는 왜 쇼핑 가방을 양손에 나눠 가지고 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비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카노가 가방 하나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정장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옷이다. 반면 점장이 꺼낸 옷은, 맙소사, 메이드 복?

"아. 아. 아아아아아아…."

기계적인 비명을 내뱉고 있는 이도영 점장, 그 때문인지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점장님, 입어보시려고요?

"아니,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메리 란도 씨! 이런 옷은 더러워지기 쉽단 말입니다!"

스위치를 잘못 건드렸나. 점장님은 그만 흥분해서 횡설수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타버렸다, 새하얗게. 다시 정신을 차린 도영 씨는 어제의 면접관, 소와 씨한테 옷을 가지고 온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대답은 참 단순, 카노가 어떤 옷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생각하던 점장님은 곧바로 복장에 대해 간단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정장이 낫겠네요."

확실히 메이드 복은 사람의 시선을 끄는 힘이 강하지만, 그만큼 관리가 매우 어렵다는 게 점장님의 첨언이었다. 대신 베레모를 씌우면 좀 더 귀여울 것이라는, 반 쯤 망상이 섞인 듯한 조언도 해 주었다. 확실히 베레모는 쓰기에 따라서 귀엽단 말이지. 베레모는 나중에 준비해도 되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린 도영 씨는 곧바로 오늘의 카페 일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도영 씨, 일단은 더 중요한 게 있어서 말이죠."

중요한 거? 뭐죠?

※ fek[페크] : <감탄사> 칫, 젠장 등 (← feki : 똥 싸다)
※ En Rusio, vin trafas trafiko![엔 루시:오 빈 트라:파스 트라피:코] : <문장> 러시아에서는 교통체증이 당신에 빠집니다!
※ Pardonon[파르도:논] : <문장, 관용구> 미안합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