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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중요한 일' 때문에 기껏 열었던 카페 문을 다시 닫아야만 했던 나는 곧바로 소와 씨의 안내에 따라 조용히 왕궁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사총사도 같이 따라다닌 건 물론이다.

이 맘때 쯤이면 어떤 이벤트가 전개될 것인지는 뻔하다. 일단 12월이니까 크리스마스가 있겠고, 연말연시이다 보니까 무슨 세트를 사면 달력을 끼워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뭐, 그런 것들이다. 그렇게 나는 달력을 굳이 사지 않고도 1년을 충분히 버텨냈다. 물론 나도 질 수는 없어서 한 번 시도했었지만, 수지타산이 안 맞아 바로 엎어버린 전력이 있어서 말이지. 내 주변에는 없었지만,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특별 선물세트도 있다더라. 대충 명절 선물세트 비슷한 구성으로 말이지.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고 한 회의실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들어가자마자 시라기 씨와 쿠다라 군이 대기하고 있었고, 둘 사이에는 또 한 분의 집사가 있었다. 실례하지만, 누구…시죠?

"가라 겐부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 네. 이도영이라고 합니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집사 경력만으로도 내 나이는 족히 넘었을, 아주 중후한 멋이 있으신 분이시다. 어르신을 맞이하다보니 고개가 절로 아래를 향하게 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나는 아직 채 익지도 않은 벼란 말이다.

사소한 것들은 여기서 접어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대체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거죠? 게다가 아직 첫날 일도 시작하지 않은 아르바이트들을 데리고 말입니다.

그러자 쿠다라 군이 보란 듯 무언가의 선물세트를 꺼낸다. 그것을 본 가라 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크리스마스 패키지… 입니다."

선물세트의 정체를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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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패키지, 말인가요?"

제가 대신 설명하죠. 이번 일도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파는 것이라서 말입니다. 작년에는 다른 것을 팔아 봤는데, 결과는 처참했고 말이죠. 재고도 올 봄에 와서야 겨우 처리할 수 있었고 말입니다. 아무튼 그리 돼서, 이번 크리스마스 패키지는 도영 씨의 피드백을 좀 받아봤으면 해서요.

그러자 도영 씨는 잠시 고민하더니, 패키지를 얼마에 팔 것인지 물어본다. 가격이라면 이미 정했습니다만. 쿠다라 군, 알려주세요.

"12,250엔입니다."

가격을 듣고 난 점장은, 비싸지 않냐고 묻는 대신 패키지의 구성물을 물었다. 내용물은 당연히 고급 식기 세트, 그것도 왕실 납품과 동일한 내용물이죠. 물론, 마지막 하나 남은 것을 채우는 건 도영 씨의 몫이지요.

"커피, 말이죠?"

도영 씨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내가 원했던 답을 대답하였다. 아무튼 1000 세트 준비했으니까 커피 역시 같은 수량으로 맞추면 될 거에요. 포장 단위는 1 킬로그램으로 해 주시고요. 그리고 어디 보자…. 더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도영 씨가 생각의 실을 끊었다.

"잠깐, 불우이웃 돕기라 하셨잖아요. 그래서 성금은 얼마죠?"

이건 조금 곤란한 질문이다. 작년엔 세트 당 1,000엔으로 정했지만 다 팔리지 않아 50만엔도 겨우 모을 수 있었다. 올해 역시 1,000 세트 다 팔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는지라, 집사부 내에서도 결정된 바가 없었다.

"그냥 여기서 빨리 결정하는 게 낫겠네요."

급기야 카페 일이 시급하다며 재촉하는 도영 씨. 신입 아르바이트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며 더욱 재촉한다. 이에 쿠다라 군은 곧바로 1,000엔을 제시하였다. 쿠다라 군의 제안, 먹힐까?

"흠. 천엔은 너무 적습니다. 사천엔 쯤 합시다."

사천엔? 회의실 전체가 술렁인다.

"사천엔. 성금, 사천엔. 크바르밀(kvarmil)로 합시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모두가 놀란다. 테리토리오 측 여자도 극구 말린다. 바로 옆의 다른 여자 역시 너무 많이 올리는 것 같다며 도영 씨를 말렸다. 놀라기는 이 쪽도 마찬가지,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곧바로 1,500엔을 제시했다.

"크바르밀."

도영 씨 역시 포기하지 않는다. 시라기는 2,000엔을 제시하며 두 배임을 강조했다. 두 배라고.

"크바르밀."

시라기의 제시, 이번엔 2500엔이다. 하지만 도영 씨는 한숨을 내쉬며.

"크바르밀."

기계로 녹음한 듯한 말투를 반복한다. 대체 어디까지 끼어야 할 지 모르겠다. 일단 나는 잠시 물러나야 될 것 같다. 협상은 시라기가 대신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시라기가 3,000엔을 제시하고 나니, 어떻게든 끼어들어야만 했다. 이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인상이다. 테리토리오 쪽에서도 금발의 여자가 도영 씨를 말린다. 하지만 도영 씨는

"크바르! !"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시라기 녀석도 지친 모양이다. 그냥 사천엔으로 하는 게 낫다 싶다. 좋다. 크바르밀!

"오케이, 단콘! 오케이, 크바르밀!"
(Okej, dankon! Okej, kvarmil!)

그렇게 협상이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도영 씨의 선언. 시라기도 지쳤지만, 나도 지친 건 마찬가지다. 반대편에 앉은 쿠다라는 협상에 아무런 기여를 한 것도 없는데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유일하게 가라 씨 만이 박수를 치고 있을 뿐이었다. 도영 씨가 떠난 자리 옆에는 그저 벙찐 표정으로 협상 테이블을 바라보는 아메리카노 사총사가 있을 뿐이었다.

"뭐하고 있습니까? 빨리 카페 다시 열자고요."

그제서야 네 아르바이트생이 자리를 떠났다. 쿠다라 군, 일단 50세트 준비해 주세요.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