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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이런 걸 가지고 협상을 하다니, 왕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 있었던 걸까. 성금이 너무 적으니 팔릴 리가 없었다는 건 왜 생각을 안한 건지. 아무튼 네 분은 아까 결정한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아차. 그러고 보니 나도 평상옷이잖아. 게다가 갈아입을 옷도 안 챙겼고! 아이고 맙소사. 나도 집사부에 연락해야 되겠네.

그렇게 평시에 입던 옷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다른 정장을 입으니까 맵시가 영 살지 않는다. 이건 뭐 '옷은 부티, 춤은 싼티'(Dress classy, Dance cheesy)도 아니고 그냥 옷도 싼티 춤도 싼티, 치즈 냄새가 진동할 분위기다. 치즈가 썩겠… 아니, 치즈는 발효시키는 거지. 그렇게 의미도 없는 신세한탄을 하고 나자 옷을 갈아입은 천사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그런 천사들을 부려먹을 악마 신세라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지. 신세 한탄은 여기까지. 일단 영업이나 재개해야 되겠다.

영업을 재개하자마자 시작한 것은 역시 커피 콩을 볶는 작업이었다. 오늘 아침에 지각한 거, 오전 일로 이렇게 만회를 해야지. 그나저나 시작하자마자 손님 한 분 오셨다.

"본베논. 테리토리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를 대신해서 손님을 맞아주는 아메 씨. 이 정도면 바로 일을 맡겨도 되겠다. 우선 그린빈을 여기 MAX라 쓰여 있는 선까지 부어주고, 시간은 15분 맞추면 됩니다. 이렇게 해 놓고 15분이 지나면 5분 동안 식혀야 하는데….

"점장님! 여기 카페 모카 하나요."

이렇게 아메 씨가 부르게 되면…. 잠깐만, 꼬였잖아. 아무튼 나머지 5분은 잔열로 볶은 다음 식히는 거니까, 그거 끝나면 저기 쟁반에 펼쳐놓고 냉장고에 넣으면 돼요. 아니, 거기 말고, 아. 모르겠다. 이따 다시 천천히 알려주죠.

하여튼 카페 모카랬지? 일단 에스프레소부터 우려내는 게 일이다. 아이고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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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우리 8명의 미사키는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결코 우리가 흥겨운 게 아니다. 크리스마스에 추어야 할 춤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체력 많이 쓰는 춤인데, 러시아 전통 춤 까지 끼어들어가서 더욱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

지쳐버린 건 나 뿐만이 아니다. 벨과 부부는 진작에 뻗어버렸고, 체력 좋다는 유니코 마저 버티지 못할 정도다. 나머지 분신들도 지치긴 마찬가지.

"일단 조금만 쉬었다가 비디오 보자."

이런 우리를 이끌어주는 건 '정신적 지주' 라이오의 몫.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에게 스포츠 드링크를 건네 주었다. 어서 마시라고 말이다. 그리고서는 뻗어버린 벨한테는 담요를 덮어 주었다. 라이오는 스스로 만족하는 모양, 사실 나도 그렇다. 내 왼편에는 이나리가, 오른편에는 레비가 누워 있는 상태. 그러고 보니 누운 모습이 완벽한 원을 그리고 있다. 정확하게는 7각형이겠지, 라이오가 없으니.

"자, 이제 비디오 보자."

잠시 쉬었을까, 라이오가 우리를 부른다. 노트북으로 영상이 전송됐다는 거다. 영상이야 스마트폰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여덟명이서 보기에는 화면이 작아도 너무 작다. 그래서 이나리의 제안으로 이렇게 한 거다. 조용히 영상을 보던 라이오는 머지 않아 우리의 행동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벨은 이 부분을 좀 더 개선할 필요가 있어."
"미사키는 이 쪽을 고칠 필요가 있고."
"유니코는 이 쪽을 좀 얌전히 할 필요가 있어. 나중에 코샤크 파트에 올인해야지."

물론, 자기 것도 말이다.

"아뿔싸. 이건 내 잘못이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