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다가왔다, 여름방학... 2014년부터 군대 같은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거의 매년 국토종주를 하는 나였지만, 이제 조금씩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더 나은 게 없을까?

2015년 여행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오면서 끊임없이 들었던 자전거여행 생각, 분명 거기에 무엇인가를 놔 두고 왔다는 생각...들을 남들이 말해주었듯 중2병으로 치부하고 여행을 포기하려는 찰나...


"형, 같이 가요."


 훼방의 주인공은 아는 동생 O. 올 6월에 막 전역했는데 모종의 이유로 내 여행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그 동안 혼자 여행해왔던 나로서 좀 고민은 됐지만, 결국 함께하기로 했다. 뭐, 어쨌든 같이 가면 돈은 아낄 테니까...

 이후의 여행 준비 과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저 대략의 여행 일정과 챙겨와야 할 물건을 알려주는 정도로 충분했다. 자전거는 앞서 두 번의 여행을 함께한 내 것을 주기로 했다. 오래 된 부품들을 최대한 갈아 끼우고 열심히 닦았다. 딱 한 가지 타협하기 어려웠던 건 O가 짐받이에 달아 쓰는 편한 가방을 마다하고 자기 배낭을 쓰기를 고집했다는 점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 번 힘든 걸 경험해 봐야 쉬운 길이 있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라나? 분명 후회하게 될텐데...

 하여간 나도 같이 물건을 정리했다. 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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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래 쓰던 헬멧, 다이소에서 산 군대삘나는 나이텍스 장갑, 3M 자외선차단 안경

 - 옷가지와 팔/발 토시, 마스크

 - 충전기와 보조배터리, 블루투스 스피커

 - 썬크림, 알로에젤, 토너

 - 펑크패치를 위시한 간단한 수리도구

 - 놀 때 쓸 이어폰

 - 담배 한 갑


며칠 후, 여행하며 쓸 물건들과 함께 배송 온 두 권의 국토종주 인증노트를 바라보았다.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동안과 다르게 이상하게 착잡했다... 


 시간은 흐르고 6월 23일 토요일, O는 다음날 인천에 올라갈 준비를 하기 위해 수원역으로 올라왔다. 문득 새로 올라온 날씨 뉴스를 봤다.

'화요일, 전국에 비'

음... 우리 둘 다 자전거에 미숙한 바, 둘쨋날 (분명 밤 늦게) 이화령을 넘을 때 땅까지 젖어 있다면 필시 피를 부를 터인데... 다소 즉흥적으로 계획을 바꿔 바로 인천으로 함께 올라가기를 택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수원역 근처 자기 집에 O를 데려갈 친구 J와 난장법석을 떨며 O를 데려와 열차 안에 태웠다. O의 군용 배낭은 정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불필요하게 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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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서구청, 좋은 경험 하고 가라는 아주머니들의 권유를 제치고 모텔을 찾는다. 항상 생각하지만 대체 왜 관공서 옆에 이런 곳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방을 잡고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며 붙인 담배 연기가 썼다. 

 내일 입을 옷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속옷 차림으로 가운을 입은 둘의 모습을 본다. 가운이 뭐 이렇게 짧냐는 불평 소리 너머로 형편없이 툭 튀어나온 둘의 배가 보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무작정 탓만 할 게 아니라, 여행 전까지 아무 노력도 없이 역대급으로 몸무게를 찌워 둔 나 자신도 한심했다.

그야말로 우리 둘은 아무 준비도 안 되었다. 대체 이런 상태로 어떻게 600킬로를 달릴 수 있을까...

눕자마자 곧바로 잠든 O와 다르게, 상념으로 한참을 깨어 있어야만 했다. 밖에서 내지르는 취객들의 꺅, 소리에 상념마저 방해받고 마침내 새벽 늦게 잠이 들었다.



[1일차, 6월 24일 일요일 - 인천~여주]


'서울 폭염주의보 발령'

 오늘의 일정은 아라뱃길부터 여주까지. 여섯 시 반에 모텔 문을 나섰다. 국토종주 수첩에 도장을 찍기 위해 시작점까지 약 10km를 갔다 돌아오는 귀찮은 방법을 택할 것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시작점에 도착했다. 항상 신기하게 바라봤던 풍력 발전기도 시간이 지나자 별 것 아니게 됐다. 도장을 어디에 찍을 지 알려주고, 다시 출발했다.

아라 물류단지를 지난다. 살이 찌지 않았을 땐 의식하지 못했던 오르막이 많았다. 벌써부터 걸어서 길을 오른다. 시작점으로부터 대략 15km쯤을 달린 계양대교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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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에 간 키위를 바르고 얇게 저민 사과를 올려 낸 이상한 토스트를 먹었다. 맛이 썩 괜찮았다. 곧 서울이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다소 성가신 일이 생겼다. 마라톤. 파란 티셔츠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게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쉬엄쉬엄 가기로 했다. 양화공원 쯤에 잠시 자리를 잡았다.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여느 마라톤 참가자들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서로의 한 쪽 팔을 리본으로 묶은 사람들의 집합. 시각 장애인이었다. 뚱뚱이 두 명이서 자전거를 타고도 힘들어하는 땡볕의 자전거길을 맨 몸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아무리 힘들어도 의지로 무엇이든 해 내는 사람들은 대단하다. 이리 보면 인간 중 가장 하등한 놈들은 무능력한 사람도 장애인도 아닌 살 찐 사람이 아닐까 싶다. 어흑 살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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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출발한다. 여의도를 지나자 마라톤은 끝이 났고 자전거를 타기가 조금 더 수월해졌다. 그런데, 여의도 인증 센터가 어디 갔지? 푯말도 있고, 길에 표시도 있고, 부스가 있던 터까지 있는데 부스만 없다. 폰을 꺼냈다. 알고 보니 인증 부스가 여의도의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 동안 만족 뿐이었던 서울 자전거길에 유일하게 실망했던 점. 아니 뭔 시발 말을 안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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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둘의 단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서로의 체력을 잘 모르니 주행 속도와 휴식 시간을 정하기가 힘들었다. 주행 중 서로 무의미한 추월과 위험한 칼치기가 반복되었다. 이 애매한 여행 속 확실한 것 단 하나는 예전과 다른 서울의 폭염이었고, 우리는 잠실에서 드러누웠다. 점점 더 느려지는 속도, 뒤를 바라본다. 갑자기 나를 추월하려는 O와 부딪힐 뻔 했다. 그렇게도 가져가지 말라 했던 군용 배낭을 뒤로 맸다 앞으로 졌다 짐받이에 매달았다 하며 고생 고생을 한다. 지나가던 어린 아이는 O의 가방을 본 후 그 입에서 "3렙 배낭!"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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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시가 좀 넘은 시각, 아직 우리는 첫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분명 지금쯤 팔당에 도착할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팔당에는 거의 두 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늘 그래왔듯 팔당에는 사람이 많았다. 주말에 수많은 직장인들이 현실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가 이내 현실을 깨닫고 월요일을 향해 돌아가기 전 국수를 먹고 가는 곳이다. 지금까지 늘 궁금했지만 혼자여서 가보지 못했던 초계국수... 다른 맛집들이 그렇듯 '원조 집'에는 줄이 길고, 다른 집들 앞에서는 할아버지들이 마치 어제 인천 유흥가의 아주머니들처럼 손님을 끌어모으려 애 쓰고 있는 모양새였다. 

애초에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뭔가 특별한 맛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비빔국수에 닭고기가 좀 큼직하게 든 느낌? O는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원래 같았으면 양평미술관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 다시 팔당에서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여주까지 가려 했던 건데... 

팔당에서 양평까지 가는 중 다시 마주치게 된 터널. 이제서야 내장 공사가 끝난건지 안의 밝기도 좋아지고 보기에도 썩 예뻐졌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이 터널들이 '그늘'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 날의 폭염은 장난이 아니었고, 터널 안 마저 후덥지근한 지옥을 맛 보았다.

결국 능내역을 조금 지나 다시 퍼질러 지고 말았는데, 그 때...


"형, 나 사실..."


 ...은 군대에서 더위를 먹어 몸이 안 좋고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거였다. 다소 걱정도 되고 험하게 굴린 게 미안해지는 한편... 그걸 왜 지금 말 해?

하여간 밖이고 터널 안이고 더운 건 매한가지였기에 일단 쉴 곳을 찾으려면 양평군립미술관까지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후 네 시 반이 되어서야 미술관에 도착했다. 

O의 안 좋은 몸, 내 놀란 허리, 그리고 지랄맞은 더위가 합쳐 더는 강행할 수 없기에 미술관 옆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둘은 약 한 시간을 졸았고, 다시 달릴 수 있게 됐다.

 그 동안 새벽에 출발하느라 만나지 못한 고개 옆 팥빙수 할머니에게 물을 받아 마시며,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페달을 밟았다. 위험할까봐 계속 뒤에 두고 달렸던 O와 마침내 나란히 달릴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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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여주보 후 여주시청에는 거의 여덟 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둘 다 제대로 빨래를 할 여력이 없어 옷을 대충 물에 담가 두고 밖을 나섰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늦다 보니 밥 먹을 곳을 찾기 힘들었다. 

 드디어 잘 시간, 침대에 눕자 문득 자전거 자물쇠를 안 채워 두고 올라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잽싸게 열쇠를 들고 문을 여는 순간, O는 전화를 받았다.

자물쇠를 채우고 올라오자, O가 말했다.


"형, 나..."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