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크리스마스까지 정말 며칠 안 남았다. 다른 데 같았으면 11월 부터 준비했을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여기 테리토리오에서는 불과 일주일 전부터 시작하는 거다. 그나저나 힘들긴 힘들다.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영업을 준비해야 한다니 말이지. 게다가 지하실에 가서 엄청난 양의 커피를 볶아야 하니 평소보다도 일찍 일어나야 했고 말이지.

그렇게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출발해 버린, 부산행 열차에 같이 탑승하자고 조르는 좀비들 보다는 한참이나 느린 대군주 한 마리. 그 한 마리가 테리토리오를 향해, 그것도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걷고 있었다. 해는 이제야 고개를 드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렇게 추운 시간대에 일을 해야 하니, 내가 전생에 나라를 말아먹었나 싶었다. 아니면 전생에 히틀러였나.

그런데 내 시야에 어떤 여자가 잡히는 것 같다. 지금 시간대에 성 안에 있을 여자는 보통 당직으로 있는 여자들 뿐이다. 그러니 소와 씨일 리는 당연히 없고 말이지. 대체 누구야.

… 했더니, 햇병아리 알바생 메리 란도였다. 메리는 가게 문을 열려 했는지 카페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쇠를 찾는 모양이긴 한데, 그 열쇠는 내가 갖고 있단 말이지. 앞으로는 어디에다 맡겨야 하나. 집사부에 맡겨도 이 시간대에는 힘들고 말이지.

"도영 씨, 비 베니스 프루에."

메리의 말대로 '일찍 오긴' 했다. 시계를 바라보니 7시 35분, 오픈 까지는 1시간 반 정도 남았다. 그런데 메리는 내가 열쇠를 꺼내들자마자 그 열쇠를 뺏어가더니, 곧바로 잠긴 문을 힘껏 열었다. 문이 열리니 손님 맞을 준비가 아직 덜 되어 있는 테리토리오의 모습이 보인다. 맞다. 이럴 시간이 없다. 커피 로스팅을 해야지. 그런데 시간에 맞출 수는 있으려나.

전혀 익숙치 않은 지하실, 그 지하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인지 커피 포대가 쌓여 있었다. 150 엘.비.에스의 그린빈 포대 5자루. 이게 오늘 할당량인가 보다. 원산지는 언제나 그렇듯이 여러 농장이 출처로 된 에티오피아 산. '하라르 게네티 싱글오리진'은 마츠오카 씨한테 줘 버려서 이제 없는데, 다시 들여오려면 석달은 기다려야 한다.

그나저나 이 포대들을 지하로 내리는 것 부터 일이겠네. 란도 씨한테 부탁하기에는 내가 너무 사타니즘 숭배 같아 보이기도 하고…. 모르겠다, 혼자 해야지.

322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일어나긴 처음이다. 아직 해는 뜨지도 않아서 집안이 어두컴컴하긴 하다. 다른 애들 깨지 않게 조심조심.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을 소리가 나지 않게 걸어갔다. 어젯밤에 찾았던 그 빨간 베레모 때문은 아니다. 바로 앞길이 걱정되는 점장님 때문이다. 이래서야 원, 집에서 밥 먹기도 글렀다.

아침 일찍 탄 버스는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갔다. 평소 가는 길에 하필 땅꺼짐이 일어났던 곳이 있어서 그렇다. 물론 지금은 응급복구가 완료되었다지만, 지금도 이 근처를 지나갈 때에는 반드시 서행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느리게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속 10km가 말이 되냐고. 30km 정도로 가도 괜찮을 법한데.

테리토리오에 거의 도착했을 때 쯤,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번호를 보니 아메한테서 온 거다. 응. 나? 지금 테리토리오에. 어. 지금 일이 있어서 말이야. 오케이,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나서 뭔가를 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이 가게 근처에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때마침 점장님이 도착했다. 어제와 같이 비실거리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아, 메리 씨. 본마테논."

인사하기 귀찮다고 아예 말을 줄여버린 도영 씨였다. 도영 씨가 열쇠를 들고 문을 열려 했지만, 너무 느려서 참을 수 없었다. 냅다 뺏어서 여는 수 밖에. 그렇게 오늘도 문을 힘껏 연 것은 나였다. 그나저나 도영 씨는 그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어디로 간 거람.

※ Ve venis frue. : <문장> 일찍 오셨네요.
※ Bonmatenon: <관용구> (= Bonan Matenon)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