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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 외환위기라는 것을 내 몸으로 온전히 받아냈어야 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막연히 기억나는 것들은 있다. 보광동 번화가 옷가게 주인 부부의 집 2층에서 얹혀 살았던 우리, 다 함께 밖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바라봤던 별들, 그 이후로 두어 번 정도 옮겨 다녔던 반지하 셋방들, 그리고 지금.
아빠는 1997년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화성에 있는 아파트 값을 순전히 막노동으로 채워 나가는 동안 그 이억 오천만원 만큼 성질 괴팍한 사람이 되었더란다. 잘 알아보면 얼마 되지도 않는 로얄 살루트를 선물받아 찬장에 모셔두고는 매일 소줏잔을 기울이더란다. 애써 키워낸 아들이라는 놈은 이런 아파트에서는 별은 개뿔 보이지도 않는다고 불평하는 쓰레기같은 자식이 됐더란다.

서론이 조금 길었지만,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세대를 막론하고 관객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아련한 기억들을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촉매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 때가 그렇게 힘들었고,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 내서 다시 위로 기어올라왔다는 기억들.

문제는 이 영화가 이러한 "과거 팔이" 외에, 영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영향도 관객에게 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요즘 사회이념에 알맞게 현명하고 행동하는 여성, 무능하고 아무 것도 안 하는 남성으로 깔끔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뉜 캐릭터들, 무슨 재난을 끌어들이는 자석 마냥 IMF를 연상하면 생각될법한 나쁜 일들은 억지로 죄다 겪는 인물들, 영화 위에서 뛰어놀며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유아인의 캐릭터, 영화 전반적으로 외환위기의 원인에 대한 차분하고 객관적인 접근은 없고 무조건 외침과 눈물로 연연하며 마치 "속은 국민이 개돼지고 바보다. 난 안 속는다니까?"라고 가르치려 드는 듯한 결론으로 배우들의 연기 말고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다.

마치 국제시장과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영화 스스로는 아무것도 없는 속 빈 강정이면서, 우리나라를 휩쓴 큰 사건을 들이밀어 관객의 감정을 쏟아내고, 관객이 스스로 자기만의 스토리를 써나가도록 강요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두 시간동안 조여드는 재미야 있었어도, 이런 건 "영화"라고 하기엔 좀 부족한 듯하다. 그저 만 원짜리 감정 쓰레기통 밖에 안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