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궁극의 환시, 감춰진 진실?
La finfina visio, La kaŝita vero?


219


"혜성 충돌까지 앞으로 5분. 시간이 없습니다."
"뭘 꾸물대는 거냐! 빨리 움직이지 않고!"


사상 초유의 비상사태이다. 혜성과의 거리는 불과 2만 킬로미터로 추정된다. 모든 일흔 일곱의 경보장치에서 붉은 빛을 내뿜고 있고, 육백 예순 여섯의 사이렌은 십사만 사천의 동식물을 당혹케 하고 있다.


워프 엔진을 가동시키려 하지만, 쉽사리 작동되지 않는다. 이미 지진으로 엔진의 대부분이 파손된 상태이다. 긴급상황인데 고칠만한 것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비상정에 탑승하려고도 했지만, 네 색(色)의 마(魔)는 이미 모든 비상정을 고철더미와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아공간 통신도, 구식 라디오 전파도 소용 없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모든 희망은 끝나 버렸다. 모든 솔루션을 찾는 동안 혜성은 이미 3천 킬로미터 앞 까지 와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분. 아무런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그렇게 우리를 태우고 있던 방주는
<별>을 탈출하지 못한 채
<별>과 함께 사라졌다.


220


헉. 꿈이었…구나.


요즘 들어 꿈을 꾸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고향에 있었을 때만 해도 한 달에 한 번 꿨던 꿈이, 이젠 매일같이 아른거리고 있다. 꿈의 레퍼토리도 가지가지. 오늘은 무슨 코스믹 블록버스터를 본 것만 같았다. 젠장, 악몽이란 말인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카스텔투로에 자리잡기 시작한 이후로 해가 점점 늦게 떠오르고 있다. 아직 동짓날이 오지 않았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슬슬 출근할 때가 됐다. 밥은 테리토리오 가서 먹을 것이니, 대충 씻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출근 준비를 마친 나는 무의식적으로 현관으로 나갔다. 그런데, 현관이 있어야 할 곳이 벽으로 막혀 있다. 누가 밤중에 시멘트 칠을 했나 싶어서 부딪혀 보려 했지만, 정작 부딪힌 것은 늘 나를 반겨주고 있던 현관문이었다. 현관 밖에서 넘어진 나는 활짝 열린 문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정작 문의 안쪽은 꽉 막혀 있었다. 설마 해서 그 벽에 손을 뻗어보았다. 벽이라 할 수 있는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환상'이다. 정확하게는 '환시'라고 봐야 하나. 아무튼 내가 잘못 본 건 확실하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고 레온토도가 잘 작동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자칫하면 도둑이 들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아무튼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속도를 내며 달리고서야 겨우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옷은 찢어지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아까 겪은 일은 나의 신경을 찢어놓기 충분했다.


대체, 어떻게 생긴 환상인 거지?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입니다.

※ 연재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입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