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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테리토리오에 찾아와 노노그램을 그리고 있었던 쿠다라 스자쿠. 그가 나를 인쇄실로 안내해 주고 있다. 쿠다라 군의 말로는, 인쇄실에 대형 플로터가 있단다. 그걸로 이미지를 출력하면 제격이겠다고 말이다. 인쇄실에는 온갖 종이도 다 구비되어 있다 하니, 거기서 4절지를 가져다 쓰면 되겠다.

도안은 진작에 USB에 저장해 놓았다. 집에서 작업했던 분량을 파일로 저장해서 갖고 온 거다. 혹시나 해서, 내보내는 형태는 이미지 파일로 했다. 화질이 떨어지지 않게 확실하게 PNG로 큼지막하게 저장해 두었다. 그렇게 대비를 단단히 해 놓은 덕에, 인쇄된 결과물은 상당히 깨끗했다.

"이거, 컬러 노노그램이네요."

인쇄된 결과물을 지켜보는 쿠다라 군이었다.

"그런데 1,200장이라니. 제가 하기에는 엄청 무리이네요."

이 정도 크기의 노노그램 한 장을 푸는 데 일주일은 족히 걸린단다. 그러면서도 하루카라면 1,200장을 1주일에 풀 수 있겠다며 나를 격려하였다.

하지만 대형 플로터는 전혀 나를 격려해 주지 않았다. A4 용지였으면 1시간 동안에 1,000장도 뽑을 수 있건만, 이 쪽은 겨우 20장 뽑는 데에 그쳤다. 내가 고품질을 고집한 탓도 있지만, 중간중간에 카트리지가 다 떨어져서 갈아끼우느라 시간을 더 허비했다. 이대로라면 다 뽑는데 최소 사흘은 걸릴 수 있다는 판단에, 조금이나마 빠르게 출력하자고 플로터를 8대 씩이나 동원했다. 그래 놨는데도 꼬박 8시간은 걸렸다. 출력하는 도중에도 비밀은 보장되어야 하니, 식사는 쿠다라 군이 갖다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 때문에 졸지에 야근한 쿠다라 군에게 묵념.

그런데, 왜 '4절지'에 '1,200장'이냐고? 나중에 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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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었건만, 나는 무슨 직장인이라도 된 듯 월요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한 일은 어김없이 분신들을 풀어놓는 일이었고, 분신들은 나름대로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스텔투로에 가지 않은 지도 며칠 되었다.

딩동.

벨소리가 들려오길래,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열었더니 역시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댔다. 대문 앞에는 도영 오빠가 무엇인가를 들고 서 있었다. 들고 있는 것은 떡 같아 보였지만, 떡이라 하기에는 받칠만한 그릇이 없었다. 사실 떡으로 보였던 것은 엄청난 양의 종이였다. 그리고 맨 윗장에는

'사쿠라다 하루카 님에게 올림.'

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중간을 끈으로 묶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이게 하루카의 것이라고요?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도영 오빠. 하지만 대체 어떤 서류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아니, 서류였다면 분명 A4용지로 가져왔을 판인데, 이건 그것보다 크다. 뭔가 다른 거라도 있는 모양이다만.

"바로 갖다줘라."

이 한마디에 찍소리도 못한 나였다. 별 수 있나, 갖다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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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낼 수 있을 확률'을 계산하고 있다.
벌써 며칠 째다.
하지만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나온 값은 '계산 불능'.

미사키로 추정되는 사람이 온다. 확률은 99.7 퍼센트. 아니, 미사키 혼자가 아니다. 분신 하나와 동행하고 있는 것 같다. 확률은 99.6 퍼센트. 유니코일 확률은 64 퍼센트.

"여기다 두면 하루카가 알아서 하겠지?"

틀림없다. 미사키와 유니코가 수근대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묵직한 소리가 들렸고, 그 옆에는 연필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문 닫힘.

!

갑자기 '내가 해낼 수 있을 확률'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묵직한 소리, 혹은 그 출처 때문인 것 같다. 조심스럽게 커튼을 걷고, 나는 조용히 그 출처로 다가갔다. 상당히 두꺼운 책이 내 앞에 놓여 있고, 맨 윗장에는.

'사쿠라다 하루카 님에게 올림.'

이렇게 내 이름이 버젓이 쓰여 있다. 누가 이렇게 두꺼운 문서를 줬는지는 몰라도, 윗부분과 중간은 끈으로 잘 묶여 있었다. 윗부분이야 당연히 제본이겠고, 중간의 끈은 바람에 날리지 말라고 해 둔 것 같다. 끈을 풀어 두고, 다음 장을 넘겨 봤건만.

겨우 퍼즐 푸는 방법이 적혀 있다. 의외였다. 잠깐만, 내가 '의외'라는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그 말인 즉슨,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튀어나왔다는 거다. 어찌됐든 이런 식으로 풀면 그림이 나온다고 한다. 제시된 대로 같은 색깔 끼리는 적어도 한 칸 이상 띄우고, 다른 색깔 끼리는 붙여도 된다. 그리고 모든 칸이 조건을 만족하면 퍼즐을 해결한 것이란다.

그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이전 장의 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될법한 문제가 있다. 한쪽 구석에는 영문 알파벳으로 무언가가 적혀 있다만, 도통 어떤 언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장도, 그 다음 장도 같은 형식이었고, 다만 숫자와 배경 색상이 저마다 다를 뿐이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색연필로 이 그림을 채우면 되는 건가.
나는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갔다. 다시 보니, 윗부분의 제본은 엉성하게 묶여 있다. 끈을 풀고 문제를 풀어 보라는 배려인 것 같았다. 그런데, 두번째 장을 다시 바라보니

'제시된 모든 퍼즐을 풀어볼 것'

이라 적혀 있었다. 양도 양인데다가 종이도 두꺼웠지만, 나는 검은 연필을 들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양의 문제를 주고 시험하는 이유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그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다. 무엇이 될 지는 몰라도, 일단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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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사각

연필을 다루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소리가 점점 거세지더니 벨이 곧바로 감지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잠이 워낙 많은 벨이지만, 요즘 들어 소리에 부쩍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서 그렇다. 조금 지나더니 나는 물론 다른 분신들도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시작됐어."

조용히 말을 꺼내는 이나리였다. 나도 그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하루카가 퍼즐 풀기를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도영 오빠가 어떻게든 하루카를 세상 밖으로 다시 내보이겠다는 굳은 결심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퍼즐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오늘도 지친다. 하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루카가 밤새 퍼즐을 풀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나의 불안감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왜 '퍼즐'이었을까.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입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