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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도전 48시간 째, 완성한 퍼즐의 수는 399장. 평균 기록은 7분 15초 안팎.

미사키와 분신들이 계속 연필을 지원해 줬지만, 내가 속도를 너무 내는 바람에 미사키들이 따라올 수 없었다. 지금까지 다 닳도록 쓴 몽당연필만 해도 벌써 수십 자루가 된다.

슬슬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오늘은 연필을 놓고 침대에 누워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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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이지 되는 게 없었다. 하루 종일 멍때렸다고 봐도 좋다. 내내 되는 일이 없어서, 아빠 앞에서 분신들을 풀어놓고 저녁식사를 즐기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하루카 때문에 이렇게 멍때린 건 처음이라고 내가 그러더니만, 레비가 그러게 왜 정신을 안 차리냐며 나무랐다. 하지만 유니코는 어느정도 나를 이해해 주는 모양이다. 늘 그랬듯이 벨은 수면 담당, 부부는 폭식 담당이다.

그렇게 스트레스 해소 겸 저녁식사가 끝나고, 재미있는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은 없나 채널을 돌리고 있는 와중에, 라이오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방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와 분신들의 빈자리를 채워줄만한 한 남자가, 간만에 연필을 내려놓은 듯 하다. 한 번 올라가 봐야 되겠다.

올라가서 보니, 하루카는 퍼즐을 풀다 말고 지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불은 전혀 덮질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데, 감기 걸릴까봐 걱정된다. 스탠드를 끄지도 않은 채 잠자리에 드러누웠나 보다.

"ㅁ…미사키."

잠꼬대하는 것도 귀엽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잠꼬대 하는 건 거의 1년 만에 본다.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다시 내려왔는데, 아빠가 하루카의 상태가 어떠냐고 한 마디 던지신다. 잠꼬대도 하는 게 귀엽다고 말을 드렸는데, 아빠는 잠시 생각해 보시더니 무겁게 한 마디를 꺼내셨다.

"그래. 도영이의 말이 맞았구나."

처음에는 도영 오빠가 건네준 그 퍼즐을 의심했다 하시는 우리 아빠. 하지만, 나의 증언을 통해 아빠는 도영 오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며 미소를 보이셨다. 그리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오빠를 의심했던 게 미안하다며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야 되겠다 하셨다.

확실히, 하루카는 퍼즐을 통해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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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게 뭐죠?

"폐하께서 미안하다고 주셨어요."

하루카의 퍼즐 수행 4일차. 오늘도 테리토리오는 평화롭다. 평일 중에서도 가장 바쁜 시기인 아침 시간을 제외하고는 꽤 한산하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 조금 문제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조만간 바쁘기 짝이 없는 주말이 찾아올테니, 커피는 충분히 볶아 놔야 되겠다. 그나저나, 언제쯤이면 대형 로스터를 들여놓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오늘도 어김없이 브레이크 타임에 또 불쑥 찾아오는 쿠다라. 게다가 이번엔 이젤 대신 다른 것을 들고 찾아왔다. 포장을 봐서는 선물 같은데, 미안하다며 주는 선물이라나 뭐라나. 무슨 예산으로 산 건 아니냐고 물었다만, 쿠다라는 폐하께서 자비 털어서 사셨단다. 어찌됐든, 선물 치고는 많이 크다. 갈 땐 시라기 씨 차 타고 가야 되겠다.

"뭐죠, 그게?"

차를 얻어 타려 하자 선물에 의문을 보이는 시라기 씨였다. 사실은 폐하께서 미안하다 주신 건데,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어요. 집에 가거든 뜯어보려고요. 그러고 보니 시라기 씨도 어제 회의에 참석하셨지. 어제 분위기가 험악해진 건 내 탓도 컸으니 사과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라기 씨는

"도영 씨는 잘못 없어요. 오히려 할 말은 하는 용기가 대단했어요."

오히려 이렇게 나를 격려해 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곧바로 놀이방으로 올라가 선물 포장을 뜯어 보았다. 테리토리오에 있는 미니 컴퓨터 만한 크기의 포장 속에는, 최신 콘솔 게임기와 함께 몇 장의 게임 소프트가 들어 있었다. 개중에는 노노그램을 다룬 것도 있었다. 퍼즐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어 보이니, 초급부터 차근차근 해 봐야 되겠다.

맞다. 하루카는 지금 퍼즐 잘 풀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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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도전 72시간째, 꼬박 사흘을 채웠다. 완성된 퍼즐의 수는 550장 남짓. 어제 간만에 제대로 자서 진전은 더디지만, 정확하게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이 풀었다. 얼추 보기에도 이미 다 푼 퍼즐과 아직 건드리지 않은 퍼즐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정확하게 세진 않아서, 이번 장이 552번째인지 553번째인지 모르겠다. 퍼즐 푸는 데에 온 정신을 쏟아붓고 있었으니 당연한 거다. 어쩌면 570번째 퍼즐일 수도 있고, 530번째일 수도 있다. (10, 15)라 읽힐 수 있는 좌표로 봐서는 570번째 퍼즐로 보이지만, 퍼즐 자체가 랜덤으로 섞인 것이라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8, 23) 다음이 (29, 21)이었으니 규칙 따윈 없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그저 우연의 일치로 (13, 3)과 (14, 3)이 연달아 나온 것 뿐이다.

겨우 이번 퍼즐을 풀었지만, 시간을 알 수 없다. 내가 언제부터 푸는 시간을 잊어버린 건지 알 수 없다. 5분인지 15분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래도 시작한 이상 포기하지 않는다.

'퍼즐'을 '그리자'.
'그림'을 '풀자'.

풀자. 그리자.
그려야 한다. 풀어야 한다.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입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