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미사키, 오늘은 하루카가 시끄럽더라."

오늘도 어김없이 일과를 끝내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빠가 한 말씀을 하신다. 보나마나 하루카가 퍼즐을 풀고 있다는 얘기다. 아빠는 오늘도 갖가지 색상의 연필을 사 오셨는데, 직접 갖다주기는 좀 그렇다고 나더러 갖다 달라신다. 하는 수 없이 분신들 풀어서 식사 준비 도와주게 하고, 연필들은 내가 갖다줘야 되겠다.

내가 방에 들어가 보니, 예상대로 하루카는 여전히 퍼즐을 풀고 있었다. 하지만 스탠드 대신에 방의 조명을 켜 놓고 열심히 풀고 있다는 게 놀랍다. 평소보다 밝은 분위기의 방에서, 하루카는 빠른 속도로 난관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연필 갖고 왔다는 말을 꺼내기도 무섭다. 몽당연필이 쌓여 있는 자리에 연필을 갖다 놓으려 하는데, 하루카의 속도 때문에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가 용기를 낸 것은 하루카가 이번 퍼즐을 다 풀고 나서야 가능했다.

"미사키?"

동생이라 그런지, 퍼즐을 끝내자마자 나를 알아본다. 퍼즐이 쌓인 것을 바라봤는데, 이제 반절은 온 것 같다.

"연필, 고마워."

이제야 고맙다는 말을 꺼내는 하루카다. 그 동안은 연필을 갖다 줘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는데, 그런 하루카가 간만에 말을 꺼냈다는 게 참으로 오랫만이다.

"그런데, 이 퍼즐은 누가 전달했어?"

그건 비밀.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그리고선 하루카를 방해하기 싫다는 핑계로 방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하루카는 분명 계속 퍼즐을 풀고 있으리라.

예상은 적중했다. 사각사각 퍼즐을 푸는 소리가 여기까지 세차게 들려오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아니, '내'가 회복한 그 날 밤 보다도 잠이 더욱 잘 온 것 같았다.

162

"도영 씨!"

오늘은 일찍부터 야단법석인 쿠다라 군. 테리토리오를 채 열기도 전에 이리도 야단이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로 왔어요?

"소와 씨가 좋은 장소를 찾았대요."

좋은 장소? 대체 어디랍니까?

"일단 가 보시면 알 거에요."

그리고서는 오늘은 2시에 점포 문 닫으라 당부하는 쿠다라 군이었다. 대체 어디인 지를 알아야 갈 수가 있지. 어딘지를 알려주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태워 주던가.

… 사실 그런 걱정 따윈 할 필요도 없었다. 오후 2시가 딱 되자마자 세 사람이 떡 하니 테리토리오에 왔다. 시라기 씨와 쿠다라 군은 구면이라 잘 알고 있고, 소와 씨도 전에 뵀던 것 같은데 자주 만나뵙지는 못해서 미안하다. 실질적으로는 '레온토도 엔 카스텔투로'라는 별도 태스크 포스의 팀장이라지만, 명목상으로는 나도 카스텔투로도 집사부 소속이란 말이다. 명색이 집사부인데 부장님을 여지껏 찾아뵙지 못하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렇게 소와 씨한테 하소연을 했지만, 소와 씨는 팀 하나 카페 하나 맡고 있는 '바쁘신 분'(나)이 어떻게 집사부의 일도 도맡아 할 수 있냐며 걱정 놓으라 하신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데요?

163

하루카의 연필 마찰음을 알람 삼아 새벽같이 일어났다. 아직은 어스름해서 거실도 꽤 어둡다. 불을 켜 놓고 보니, '7마리의 작은 새'들은 여전히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특히 유니코는 이불을 아예 차 버린 채 드러누워 있었고, 그 뒤를 샤우라가 끌어안는 식이었다. 이나리와 라이오는 서로를 부둥껴안고 있었다. 부부는 꿈에서 고기라도 먹는 듯 벨의 종아리를 잡아 당기고 있었다. 라이오 혼자 다른 분신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있다.

분신들 깨지 않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나서는, 부모님의 몫까지 다 해놓고 곧바로 등교길에 올랐다. 오늘만큼은 분신들이 필요한 일이 학교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새벽 공기를 마시며 등교한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해가 조심스레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직은 '낮'과 '밤' 사이의 어중간한 때이지만, 황혼(黃昏)과는 정반대이다. 여명(黎明)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다. 새벽(夜明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 그리고 '희망'.

… 내가 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담. 빨리 등교해야지.

164

우리 넷이서 차를 타고 달려간 곳은, 하루카와 미사키가 졸업했다는 중학교이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체육관을 겸한 강당인데, 원래 이곳을 점유하던 연극부가 1주일동안 외부 공연에 들어간다며 자리를 비워 준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그나저나 하루카가 연극부에 들어갔을 리는 만무하겠고, 유일한 후보는 미사키일텐데.

"사쿠라다 선배님도 여기를 3년동안 지켰어요. 물론, 선배 본인은 아니고 분신 한 분이지만요."

교장선생님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안내해 준 학생회장이 한마디 던진다. 방금 '사쿠라다 선배'라 했으니, 분명 미사키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연극부라면 레비가 엄청 활약했을 것 같다. 그걸 굳이 학생회장에게 묻긴 했는데, 긍정이다. 아무튼, 강당 감상은 일단 접어두고, 우선 나는 보폭으로 강당의 규모를 짐작해 보았다. 강단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가로 50보에 세로 70보 정도 된다. 이 정도면 딱이다.

"정말로 여기에다 다 펼쳐놓을 건가요?"

그걸 굳이 묻는 쿠다라 군이다. 당연히 펼쳐놓을 겁니다요. 그러자 쿠다라 군은 한 장 씩 펼쳐놓을 거라면 그냥 왕궁 내에서 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이제 말해야 하나. 사실 하루카가 풀고 있는 퍼즐은 개별 퍼즐 만으로는 알 수 없어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이어붙여야지 완성되는 식이죠.

그러자 다소 놀라는 시라기 씨. 소와 씨도 거든다.

"'퍼즐 속의 퍼즐' …인 거죠?"

굳이 따지자면 그렇죠. 지금쯤이면 하루카가 눈치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소와 씨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제야 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곧이어 시라기 씨가 입을 연다.

"다 이어 붙이면 뭐가 나올까, 기대도 됩니다."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뭐가 나올까요?"

역시 기대하는 쿠다라 군,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비밀이니까 곤란합니다. 자세한 건 하루카가 다 풀고 난 뒤에 맞춰 보세요.

※ 'Teritorio de Leontodo'는 에스페란토로 '민들레 영토'를 의미합니다.

※ 이 소설은 '성 아랫마을의 단델리온' 팬 픽션입니다.

※ 사이트 사정으로 인하여, 오늘은 11시간 늦게 연재합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유전자' 따위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이다.